전체길이는 동서로 약 1km에 이르며 석굴의 총수는 42개이다. 동쪽 언덕에 제1∼4동(), 중앙 언덕에 제5∼13동, 서쪽 언덕에 제14∼42동이 있다. 북위()의 역사서 《위서()》의 〈석로지()〉에 따르면, 사문통(:종교장관) 담요()가 당시 문성제()에게 석굴 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담요 오굴()’이라고 불리는 제16동에서 제20동까지가 이때에 만들어진 석굴로, 460년대 초에 조영된 것이다.

윈강석굴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양식은, 제20동의 노좌대불(:높이 14m), 제19동의 대불(높이 약 17m)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에 초기 양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치졸하지만 소박한 면과 선으로 구성된 서방 양식이 풍부한 작풍이다. 담요 이후는 전통과 외래 양식이 혼합되면서 다양해졌다. 이 석굴의 융성기는 486년 전후였는데, 이 무렵의 불상은 중국 고대의 복제()를 모방하였다. 신체보다도 복제 표현에 유의하여 조각하였고, 얼굴은 길며 매우 신비롭다. 북위불() 또는 육조불()이라 하여 후에 하나의 조상 기준이 된 것도 이 무렵의 불상이다.

이 석굴은 북위의 문화사적 유산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서북 인도·중앙 아시아와의 문화적 교류 및 한국과 일본의 고대문화를 만들어낸 아시아 문화 생성의 자취를 입증해 주는 중요한 유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