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佐賀縣 神埼郡 神埼町, 三田川町, 東脊振村에 걸쳐 위치한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최대의 환호(環濠) 취락과 독널무덤(甕棺墓) 유적이다. 神埼공업단지 조성계획 일환으로 1986년부터 4년 7개월간 발굴조사 되었는데, 지금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역사공원 정비복원을 추진중에 있다.

유적은 佐賀평야의 동부 세부리 산지 남쪽 기슭에 길고 낮게 뻗은 志波屋과 吉野ケ里의 저구릉상 대지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약 40ha범위에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 길게 田手川가 흐르고 있으며, 남쪽 끄트머리로는 JR長崎本線과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B.C. 3세기경 야요이시대 전기 초에 구릉 남단에 조성된 환호는 폭 2~3m, 깊이 2m의 단면 ‘V’자형으로 남~북 200m, 동~서 120~160m의 크기를 갖고 있다. 야요이 중기에는 총연장 1㎞ 이상, 최대 폭 6.5m, 깊이 3m의 환호와 목책으로 둘러싸인 대규모 환호취락이 조성되었다. 후기로 오면 앞서의 호를 외호(外濠)로 삼아 그 안쪽 거의 중앙부 구릉 정상에 남~북 150m, 동~서 70~80m의 내호(內濠)가 만들어져서 취락의 중심부를 형성하였다.

또한 내호 안 북서쪽에 별도의 구(溝)로 둘러싸인 10,000㎡의 남내곽(南內郭) 구역 안에는 신분 높은 사람이 거주하는 움집자리(竪穴住居址)와 고상(高床) 굴립주건물지(掘立住居址)가 조사되었다. 그러한 내호의 한쪽으로 특히 조망하기 좋은 돌출부와 입구 가까이에는 별도의 고상 굴립주건물터가 확인되어 『삼국지(三國志)』 왜인전(倭人傳)에 나오는 ‘루관(樓觀)’이라는 이름의 망루를 연상시킨다.

또한 야요이시대 후기 말에 북쪽에 치우쳐 2중환호로 둘러싸인 3,000㎡ 범위의 북내곽(北內郭)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3×3칸의 12.5×12.5m의 대형 굴립주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직경 40~50㎝ 정도의 굵은 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 건물은 일종의 거관(居館)으로 추정되는 바, 이 건물이 들어선 북내곽은 吉野ケ里 전체 취락의 중추부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원형(圓形), 방형(方形)의 돌출부가 있는 2중호의 여러 지점에 망루로 보이는 굴립주건물터가 확인되고, 입구 통로는 열쇠모양으로 책렬(柵列)이 보강되어 경계 방어시설이 더욱 강화된 것임에 더욱 그러하다. 한편 외호 서쪽 다소 낮은 곳에는 고상 창고터가 21기 조사되었는데 거의가 1×2칸의 여섯 기둥건물로 이루어졌으며, 이 고상 창고터에서 취락 내부로 들어가는 외호의 지점에 육교가 놓이고 문기둥터가 확인되었다. 남쪽 환호 끄트머리 부근에서는 청동기주조와 관련된 직경 8m정도의 대형 토광이 조사되었는데, 그 주변에서는 동검(銅劍), 동꺾창(銅戈), 파형동기(巴形銅器) 등의 거푸집(鎔范)이 주석덩어리와 함께 발견되어 이곳에 공방(工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은 외호(外濠) 북쪽과 남쪽의 안쪽 가장자리에 2기의 분구묘(墳丘墓)가 있는데, 2,000여 기의 거대한 독널열(甕棺列) 매장유적과는 떨어진 위치에 있어 지배층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남쪽 분구묘는 거의 파괴되고 잘 남아 있는 북쪽 분구묘를 살피면 남~북 약 40m, 동~서 26m이상으로 평면 장방형(長方形)에 근접한 것이다. 분구는 판축기법으로 성토(盛土)하여 원래 4.5m 이상의 높이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14기의 성인용 독널(甕棺)이 조사되었는데, 그 중 8기의 독널에서는 동검 각 1점씩이 부장되어 있어 일반 독널무덤과 차별되고 있다. 분구묘 주위에는 제사용토기를 매납한 대규모 제사유구가 수 개소 확인되었다.

이처럼 吉野ケ里 유적은 40㏊에 걸친 면적에 외호와 내호가 조성되고, 그 안에 별도의 수장층 구역이 있으며, 주변으로 망루, 고상창고(高床倉庫) 등이 있어 국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의 중심 읍락, 혹은 도시의 출현을 고고학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한국계의 청동기와 무문토기가 나와 한국의 세형동검집단의 일본으로의 진출과정을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