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성사삼탑(崇圣寺三塔)은 다리바이족자치주(大理白族自治州) 다리시 북쪽 1.5㎞의 창산(苍山) 응악봉(应乐峰) 아래 창산을 뒤로하고 얼하이(洱海, 이해)에 임해 있는 커다란 한 개의 탑과 작은 두 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이리(大理, 대리)와 윈난 고대 역사문화의 상징이며 중국 남방 지역에서 오래되고 웅장한 건축물의 하나로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숭성사탑은 당 개원(开元) 연간(713~741)에 건립되었으며 대탑(大塔)이 먼저 건립되었고 남북의 소탑(小塔)이 이어 건립되었다. 현재 사찰은 이미 훼손 되었으나 삼탑은 보존이 잘 되어 전해지고 있다. 주탑인 천영탑(千寻塔)은 남북 2개의 작은 탑과는 70m 거리에 위치하여 삼족(三足)이 정립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탑의 기좌(基座)는 사각형으로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래층 폭은 33.5m, 윗층은 21m이다. 탑신의 아랫변 폭은 9.9m, 높이가 69.13m로 사각형의 밀첨식(密檐式) 공심(空心) 전탑(砖塔)이며 16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시안 대소안탑(大小雁塔)과 유사한 전형적인 당대(唐代)의 건축풍격을 보이고 있다.

탑신(塔身) 내벽(内壁)은 수직으로 상하가 서로 통하며 목조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탑의 꼭대기에 올라 작은 구멍으로 다이리고성(大理古城)의 전모를 관람할 수 있다. 탑은 백회(白灰) 칠해져 있으며 각 층의 사면에는 불감(佛龛)을 두었으며 대칭하는 불감에는 불상을 모셔두고 다른 불감에는 창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금속 탑찰(塔刹) 보개(宝盖), 보정(宝顶)과 금계(金鸡) 등을 설치하였다. 아랫부분에는 다이리석 상에 명초기 장수인 검국공(黔国公) 목영(沐英)의 후예가 쓴 영진산천(永镇山川)이라는 네 글자가 상감되어 새겨져 있다. 삼탑(三塔) 남북 두 개의 탑은 주탑(主塔)의 서쪽에 위치하며 주탑으로부터 70m,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으며 상호 거리는 97.5m로 모두 오대시기(五代时期) 다이리국(大理国)에 의해 건립되어 동일한 형태로 모두 10층, 높이 42.4m의 팔각형 밀첨식(密檐式) 공심(空心) 전탑(砖塔)이다.

외관은 누각식(阁楼式)으로 장식하였고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두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탑을 수축할 때 한 층 한층 건축하며 주위를 같은 높이로 흙을 쌓아 건축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탑이 완공된 후 쌓인 흙을 치워 탑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여 퇴토건탑(堆土建塔) 또는 알토현탑(挖土现塔)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숭성사(崇圣寺)는 원래 삼탑의 서쪽 창산(苍山)에 위치하였으며 산문(山门)은 삼탑의 주탑으로부터 약 120m 거리에 있다.

남조국(南诏国) 제10대 왕 권풍우(劝丰右) 시기(824~859)인 남조국 후기에 건립되었으며 대대로 확장이 이루어져 다이리국(大理国) 시기에 들어서는 대단히 흥성하였다고 한다. 남조는 중기부터 불교를 숭배하기 시작하여 권풍우 시기에 극성기를 맞아 윈난 내에서만 작은 사찰이 3,000개, 큰 사찰이 800여 개가 되었다고 한다. 남조 이후의 다이리국에서는 불교가 더욱 발전하여 다이리국을 불국(佛国), 묘향국(妙香国)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숭성사는 건립 이후 남조국, 다이리국의 불교활동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관음(观音) 숭배(崇拜)가 절정에 이르렀다.

남조국(南诏国) 시기의 당 정원(贞元) 18년(802) 지금의 미얀마인 표국(骠国) 국왕 옹강(雍羌)과 왕자 서난타(舒难陀)가 남조왕 이모심(异牟寻)의 동행하에 숭성사에 와서 향을 피우고 기도하였다. 이로 인해 숭성사 삼탑은 동남아시아에서 숭상하는 불교 성지인 불도(佛都)가 되었다. 다이리국 시기에 이르러 다이리 제1대 국왕 단쓰핑(段思平)이 불교를 몹시 좋아하여 해마다 사찰을 짓고 불상을 만들었고 1056년 지금의 태국인 성라(星逻) 국왕 야다(耶多)가 두 차례에 걸쳐 숭성사를 방문하는 등 불교가 매우 흥성하였다.

다이리국 시기에는 22명의 국왕 중 2대 단사영(段思英), 8대 단소륭(段素隆), 9대 단소정(段素贞), 11대 단사렴(段思廉), 13대 단수휘(段寿辉), 14대 단정명(段正明), 15대 단정순(段正淳), 16대 단정엄(段正严), 17대 단정흥(段正兴) 등 9명의 국왕이 숭성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 중 제2대 국왕 단사영은 즉위 1년 만에 숭성사에 출가하였다. 이러한 국왕의 출가는 그들이 불교를 매우 좋아하기도 하였지만 주요 원인은 왕위쟁탈 투쟁에서 실패한 후의 일종의 출구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많은 국왕의 출가(出家)는 세계 불교사에서도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수많은 국내 및 동남아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동남아인들로부터는 황가국사(皇家国寺)로 추앙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