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사상 최대의 내전인 서남전쟁의 무대가 된 성곽.

원래 축성목적은 가토 기요마사()가 영주가 되면서 거주할 목적으로 쌓았다.

구마모토성은 1632년 축성자인 가토 기요마사가 죽고 대신하여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봉해져 호소카와 가문이 거주하는 성으로 에도시대 내내 지속된다. 이 성은 메이지()시대까지 남아 있었으나 1877년 서남전쟁(西) 때 소실된다. 현존하는 천수()는 1959년 복원된 것이다.

서남전쟁 때 성이 소실되는데 전투로 인해서 불타버린 것이 아니라 성을 지키던 장군 다니 다테키()라는 인물이 성내의 병사들에게 결의를 다지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불을 놓아 소실 된 것이라 한다. 이로써 공격하는 사이고 다카모리(西)가 이끄는 군대의 포위와 맹공에도 동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성은 평산성()으로 동고서저(西) 지형에 핵심구역(), 제2구역(), 제3구역()의 3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축성자 가토 기요마사는 축성의 명인으로 높은 석축을 쌓을 때 아소화산재의 연약한 지반위에 축성하기 위해 석축의 아래쪽은 넓게 펼치고 위쪽은 수직으로 쌓아올리며 곡선형을 이루는 석축을 구사하였다. 성곽건축에서는 근접하는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개구부와 성벽에 붙은 적군에 돌을 던져 공격할 수 있는 개구부가 설치되어 있다. 천수 높이 약 32m이고 천수대 석축높이는 약 16m이다. 특히 천수의 1층 부분은 석축보다 튀어나와 있어서 성벽에 붙은 적군을 공격할 수 있도록 사각()이 없는 투석창을 만든 것이 주목된다. 또한 가토 기요마사는 축성을 계획할 때 그의 오랜 전투경험과 조선의 진주성()을 공략할 때 얻었던 신지식에 오사카성 축성에 참가한 경험을 살려서 가능한 거석을 수집하고 거목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고 한다.

축성의 명인으로 알려진 가토우 기요마사가 심혈을 기울인 이 성은 성의 진면목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다가 메이지시대에 비로소 서남전쟁으로 인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西)가 인솔하는 병력 12,850명이 구마모토성을 52일간에 걸쳐서 포위 공격하였으나 공략하지 못하였다. 이 때 성안에는 다니 다테키 소장() 이하 3,415명의 병력으로 사이고(西)의 군대를 막아냈다고 한다. 이것은 명지휘와 성안의 병사들의 투지와 분투에 의한 것도 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견고하게 쌓은 구마모토성이 명성()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것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성 내의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야구라() 11기, 문 1기 등이 있으며 현재 이들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